교육후기


뇌와 통증, 그리고 움직임, 이야기된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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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게 된 순간
우리는 계속해서 뇌를 알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다.

뇌가 일으키는 통증은 어떠했는가?
과거에 느꼈던 고통뿐만 아니라
미래에 겪게 될 잠재적인 통증까지 포함한다.
게다가 불쾌한 감각과 경험까지 아우른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아프지 않더라도
인간은 늘 통증이 전제된 존재다.

이 모든 것들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뇌는 통증을 반응 안에 가두어둔다.
그리고 이것은 뇌의 각 영역에 입력된다.

고통은 통증과는 다르게 반응 밖에 있기에
우리는 뇌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야기된 고통을 다시 이야기해야만 한다.


 왜 하필 이성복 시인은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말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그것을 겪고 난 뒤에 면밀히 자조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무언가 하나의 현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 못지않게 관철시키려는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경험할 때의 찾아오는 몰입감과 경험 뒤에 찾아가는 직면함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몸의 입장에서, 그리고 몸이 아닌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반응 안에 존재했던 통증과 반응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고통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뇌와 움직임의 관점에서 여실히 나눴었던 이번 이야기는 어땠나요.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수의적인 여부를 떠나 감정은 일차적으로 뇌에서 조절됩니다. 내가 조절한다고 이것이 그만큼 조절되는 것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조절하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감정은 몸과 분리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야기된 고통과 같이 감정을 자조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쩌면 결국에는 감정의 조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이게 뭐냐면, 그리고 우리가 뇌의 각 영역에서 통증의 경로와 기전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냐면, 저는 이것이 몸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었음을 이야기했던 겁니다.

 뇌는 이미 우리의 경험을 입력시켰고, 그를 통해서 아직 겪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까지도 통증의 영역을 넓혀나갔으니까요. 그래서 결국에는 근육 하나를 안다고, 혹은 뇌 하나를 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말했던 거예요. 몸을 알아야 한다는 건, 몸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마치 이야기되지 않은 고통이라면, 그것이 이야기될 때까지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