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건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을 뒤집고 헤집으며 깨부숴야 한다.
지식은 곧 인식이 될 수는 있지만, 매번 사실을 담보하진 못합니다. '앎'과 '삶'이라는 키워드만 생각해보세요. 알아가는 것은 배우고 익히며 쌓아나가는 것이지만, 살아가는 것은 몸소 경험하며 움직이고 넓혀나가는 것이니까요. 물론 '앎'으로 그것을 살아낼 수도, 반대로 '삶'으로 그것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승화시킬 만큼 예민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네요. 그래서 '앎'만으로도 부족하고, 또 그만큼 '삶'만으로도 부족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무엇을 선행해야만 할까요. 전 사람들의 '삶'까지 책임질 수 없어요. 그래서 단지 '앎'을 자극할 뿐이네요. '앎' 이상의 '삶'은 언제나 순전히 각자의 몫이에요. 그래서 시중의 '앎'과 제가 드린 '앎'의 것들을 파괴시키라고 요구한 거예요. 만약 파괴하지 못하겠다면 '삶'의 문제를 반추하세요. 파괴의 힘은 '삶'에서 비롯되니까요.
안다는 건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을 뒤집고 헤집으며 깨부숴야 한다.
지식은 곧 인식이 될 수는 있지만, 매번 사실을 담보하진 못합니다. '앎'과 '삶'이라는 키워드만 생각해보세요. 알아가는 것은 배우고 익히며 쌓아나가는 것이지만, 살아가는 것은 몸소 경험하며 움직이고 넓혀나가는 것이니까요. 물론 '앎'으로 그것을 살아낼 수도, 반대로 '삶'으로 그것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승화시킬 만큼 예민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네요. 그래서 '앎'만으로도 부족하고, 또 그만큼 '삶'만으로도 부족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무엇을 선행해야만 할까요. 전 사람들의 '삶'까지 책임질 수 없어요. 그래서 단지 '앎'을 자극할 뿐이네요. '앎' 이상의 '삶'은 언제나 순전히 각자의 몫이에요. 그래서 시중의 '앎'과 제가 드린 '앎'의 것들을 파괴시키라고 요구한 거예요. 만약 파괴하지 못하겠다면 '삶'의 문제를 반추하세요. 파괴의 힘은 '삶'에서 비롯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