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이 어디에서부터 기초되었는지 묻는다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해부학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부터 존재한 만큼, 어디에나 있었던 거예요. 이러한 성정이 반영되어 스스로의 형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갈망하는 게 우리 인간들이고요.
그래서 이러한 성정에 직시할수록 몸이 드러나요. 그리고 몸이 보여요. 우리들이 비록 움직임과 관련하여 몸을 연구하려 들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와 같은 접근만으로는 몸의 본질적인 표현을 헤아릴 수 없어요. 그래서 더욱 일상에서부터 출발했던 몸과 관련된 학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거예요. 해부학도 그러하지만, 어떤 학문이든 상관없이 몸이 시사하고 있는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직시된 만큼 너무 당연스럽게 여겨지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게 공부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날마다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학습의 의미를 두지 않아요. 이것은 전혀 의도적이지 않은 무의식적인 영역이고요. 더불어 중추로부터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학습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표현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 이미 일상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앞으로는 더 강력하게 일상으로 스며들어야 해요. 저는 이게 진정으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해부학을 대하는, 그리고 몸을 대하는 자세라고 봐요.
해부학이 어디에서부터 기초되었는지 묻는다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해부학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부터 존재한 만큼, 어디에나 있었던 거예요. 이러한 성정이 반영되어 스스로의 형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갈망하는 게 우리 인간들이고요.
그래서 이러한 성정에 직시할수록 몸이 드러나요. 그리고 몸이 보여요. 우리들이 비록 움직임과 관련하여 몸을 연구하려 들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와 같은 접근만으로는 몸의 본질적인 표현을 헤아릴 수 없어요. 그래서 더욱 일상에서부터 출발했던 몸과 관련된 학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거예요. 해부학도 그러하지만, 어떤 학문이든 상관없이 몸이 시사하고 있는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직시된 만큼 너무 당연스럽게 여겨지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게 공부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날마다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학습의 의미를 두지 않아요. 이것은 전혀 의도적이지 않은 무의식적인 영역이고요. 더불어 중추로부터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학습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표현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 이미 일상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앞으로는 더 강력하게 일상으로 스며들어야 해요. 저는 이게 진정으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해부학을 대하는, 그리고 몸을 대하는 자세라고 봐요.